꿈왕국_사이가 여우비

2018. 7. 21. 10:39팬아트/글

* BGM 재생을 권장합니다.


 파드득. 처마에서 떨어진 굵은 물방울을 맞고 뾰족한 귀가 흔들렸다.
 햇살을 다 가리지 못한 구름이 반짝이는 빗줄기를 온 초목에 흩뿌리고 있었다. 툇마루에 앉아 바깥을 응시하는 그의 은빛 머리칼은 평소보다 조금 차분한 음영으로 가라앉은 듯 했다. 빗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던 푸름 속에서 무심코 귀를 털어버린 그가 멋쩍게 중얼거렸다.

 "도무지 예상치를 못한 비로구나. 이번엔 내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을 우리 아씨는 알까."

 그럼요. 나는 빗소리에 가려 들리지 않을만큼 작게 대답하고 정원으로 열린 장지문에 머리를 살짝 기댄다. 언제나 올려다보던 그의 앉은 뒷모습을 내려다보는 것은 조금 낯선 기분이다. 그는 짙은 옥빛의 술잔을 한 번 기울이고는 곧 하늘을 올려다보며 나직이 말했다.

 "예로부터 이리 훤한 하늘에서 비가 쏟아지거든 '여우의 혼례날'이라 이르고는 한다만..."

 톡, 토독. 빗방울이 풀잎을 때리는 소리가 정적을 메웠다. 나는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해 조금 곤란하게 미소짓는다. 그는 곧 조용히 웃었다. 온화한 음색이 빗소리와 어우러졌다.

 "이런 말을 하여도 난처할 뿐이겠지."

 ―아니에요, 기쁜걸요. 나는 여전히 그에게 닿지 않는 목소리로 조용히 대답한다. 그는 왼손에 든 술잔을 비우고는 그대로 팔을 치켜올려 빗물을 받았다. 도기의 묵직한 녹색은 햇살을 받아 둔탁한 광택을 띠었다.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던 그는, 무언가가 떠오르기라도 했는지 이번에는 키득키득 웃었다.

 "애시당초 여우의 혼례狐の嫁入り라 함은 사람이 여우인 처를 들이는 것이거늘. 그렇다면 내 네게 시집을 가야 하려나."

 ―푸흡. 생각지도 못한 농담에 무심코 숨이 새어나간다. 그 또한 말로 하고 나니 한층 더 우스워진 모양으로, 양손으로 툇마루를 짚고 몸을 젖혀 껄껄 웃었다. 나도 소리를 내어 웃고, 그의 왼편으로 다가가 앉는다. 편안한 울림에 따라 오르내리는 그의 울대를 나는 그저 가만히 바라본다. 그는 나보다도 한참을 더 웃더니, 옅게 눈물기가 어린 눈으로 멀리 초목으로 시선을 옮겼다. 완만한 호를 그리던 그의 입술에서 이윽고 가라앉은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내 정인이라면 농으로 여겼을 터. 허나 나는 그리 해도 좋았을 것이다."

 그는 아까 빗물을 받았던 술잔의 가장자리를 매만지더니, 양손으로 조심스레 잔을 들어 세 번에 걸쳐 잔을 비웠다. 술이 아니라는 것은 개의치도 않는 모양이었다. 나는 명치가 꽉 조이는 느낌이 들어 가슴께에 손을 모은다.

 "혼례라면 세 잔을 나누어야 하나三三九度 오늘은 잔이 하나밖에 없으니 난처한 일이로다... 아니, 내 이런 생각을 자꾸만 하게 되는구나. 우리 아씨에게는 부담이었을 것을."

 ―그렇지 않아요. 이번에는 그에게 분명히 들릴만큼 큰 목소리로 즉답한다. 술로 다시금 잔을 채운 그는 쓴웃음을 짓더니,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래도 생각하게 되는구나. 그렇게 쉬이 보내지 말 것을 그랬다고. 네 소임을 알기에 위험한 여행길을 막을 수 없었다지만, 하다못해 이 마음을 어떻게든 보이도록 엮어둘 걸 그랬다고."

 나는 무심코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려 뻗은 손을 얼른 거둔다. 그는 내가 있는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는, 먼 시선으로 속삭이듯 말했다.

 "그리 해도 되었을지 물어라도 보고프거늘, 이제는 영영 알 수가 없구나. 내 정인아."

 ―...분명 기쁘게 받아들였을 거예요. 지금처럼. 그에게 결코 닿지 못할 말은 목소리가 되어 나오지 못한 채 삼켜진다. 내뱉어도 무상할 뿐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는 보이지 않을 내 모습에서 시선을 거두고 천천히 잔을 비웠다. 나는 그런 그의 곁에 그저 앉아있다.
녹수정 구슬같은 눈동자와 내리깐 눈꺼풀에 발린 연지와, 잔잔히 웃으며 언제나 아름다운 말들을 들려주던 입술과 물기를 머금어 빛나는 은발과 지금은 조금 처져 있는 귀와, 품위 있고 단정한 옷매무새와 그것을 받쳐주는 굳건한 어깨와 곱지만 단단한 손가락 하나하나까지도, 모두 나에게 온전히 허락된 것이었다. 이제는 그에게 닿지 못하는 나에게. 그는 조금 갈라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네가 없는 나는 언제까지고 홀로 남겠구나, 우리 아씨야."
 ―그래도 저는 영원히 당신 곁에 있을 거예요, 사이가 씨.

 이윽고 그는 숨을 고르더니 언제나 부르던 노래를, 원래라면 경쾌했을 터인 곡조를 천천히 읊었다. 그것은 처음부터 하나였던 것처럼 빗소리와 어우러져, 어느샌가 나 또한 같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꽃이더냐, 소나기더냐."


[BGM : <風> from Musmus ( http://musmus.main.jp/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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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나.... 또... 히메를 죽여버렸다....()
두어달 전에 생각했다가 이제야 겨우 쓴 이야기. 팬픽션이라니 얼마만이람?
죽은 사람의 시간은 더이상 가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일부러 히메의 시점은 현재형으로 썼다
(근데 딱히 안 죽은 사람도 맨날 이렇게 써버렸던 기억이 남)

그림은... 그리면서도 무척 생각대로 되지 않았고 색감 때문에 캘리브레이션 하다가 모니터 맛이 가버렸지만
그래도 뭐... 그린 건 그린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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