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6. 2. 01:04ㆍ창작/글
* BGM 재생을 권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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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의 인식은 바깥으로부터 찾아왔다.
아직 열 살이 채 되지 않았을 무렵, 토요일 오후. 별다를 것도 없는 하굣길을 낯선 그림자가 막아섰다. 옆으로 비켜 가려던 발걸음은 거듭 가로막혔다. 겁먹은 나를 붙들고 이름을 부른 것은 나의 아버지였다.
아빠도 못 알아보냐, 요 녀석아. 땅만 보고 걸어다니니 그렇지, 그것 참. 이런 이야기 한두 마디가 저녁상에 더 얹혔을 뿐, 그날은 금세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평범한 날이 되었다. 어쩌면 나에게도 그날은 평범했을 것이다. 사실 그날 이후로 나 자신이 변하지는 않았으니까. 하지만 나는 그날 처음 나의 문제를 알았다.
전에는 어긋난 줄도 몰랐던 것이 나날이 위화감을 겹쳐갔다. 종종 찾아가 놀았던 옆집 아저씨를 길에서 그냥 지나쳤다. 친척들 사이에서 누가 누구인지 눈치를 보았다. 이사가기 전에는 늘 붙어다니던 친구들이 떠오르질 않았다. 처음 만난 한 학년 선배와 두어 시간 마주앉아 이야기를 하고 헤어져 집에 가던 길, 반가이 손을 흔들기에 의아했던 낯선 사람이 30분 전까지 함께 웃고 떠들던 그 선배라는 걸 나중에야 전해들었다. 그때 나는 열 너댓살 정도 되었고, 내 안에서 문제가 확실해졌다.
사람을 제대로 안 보니까 그래. 다들 그렇다. 네가 노력을 좀 해 봐라. 그래도 역시 그냥은 무리였다. 내 안에 쌓이는 이름도 추억도 늘어만 가는데, 그게 어떤 얼굴의 것인지 기억이 잘 안 났다. 어떤 얼굴들은 그럭저럭 제자리를 찾았지만, 많은 얼굴들이 머릿속을 헤매다 사라졌다. 나는 급했다. 넘치는 기억들을 당장 붙잡아야 했다. 그 많은 얼굴들을 기억하고 구별할 수 있을 때까지 시간을 멈출 수 없었으니까.
다행히 나는 남들보다 그림을 조금 더 자주 그리는 애였다. 똑같이 생긴 동그라미가 수십 명의 다른 종이인간이 되는 것에는 익숙했다. 나는 종이 바깥의 사람들을 동그라미로 만들기로 했다. 거기에 머리카락을 얹고, 얼굴색을 칠했다. 광대뼈가 튀어나왔거나 눈에 띄는 곳에 점이 있을 때는 편했다. 눈은 특히 기억하기 어려웠다. 쌍꺼풀이 있나 없나 정도는 기억했지만 때때로 그것마저 잊어버렸다. 제일 큰 도움이 되는 건 안경이었다. 아직 모두가 이름표를 달고, 특별히 머리모양이나 옷차림에 변화를 주지 않던 때까지는 그럭저럭 괜찮았다. 작은 학교이기도 했고.
스무 살이 되자 조금 더 복잡해졌다. 처음에는 동그라미에 씌울 것들이 잔뜩 늘어나서 편했다. 모여있는 사람들은 대체로 취해 있었고, 대부분 다음번에도 서로를 못 알아보았다. 나도 그 사이에서 함께 깔깔 웃었고, 몰래 눈알을 굴릴 시간을 벌었다. 수십 개의 동그라미에 이름을 써서 정리했다. 특이한 목소리나 말투도 같이 묶어두었다. 그래도 모르겠으면 일단 말을 돌렸다. 여기 서로 처음 보는 분들도 계실테니 자기소개 한 번 할까요? 그리고 그 자리에 있는 얼굴들을 주워담았다. 그런대로 할만했다.
하지만 모두가 모두를 기억한 다음, 이제 사람들은 쉽게 변했다. 모두는 모두를 기억하니까 괜찮았다. 나는 아니었다. 안경을 벗고 렌즈를 낀 사람, 머리를 물들인 사람, 화장이나 옷차림을 한순간에 바꿔버리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다들 반갑게 인사를 나누며 달라진 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못 했다. 모두는 모두를 기억했지만, 나는 기억하는 척만 했으니까.
내 머릿속은 고치다 만 동그라미들로 엉망이었다. 쉽게 기억하려고 그려넣은 것들이 갑작스레 벗겨졌다. 미적지근하게 남은 것들을 다시 짜맞췄더니 그게 그거 같았다. 어떻게든 알아보려고 남은 특징들을 잔뜩 부풀렸다. 갈색 곱슬머리, 까만 뿔테안경, 자주 입는 셔츠, 종종 짓는 표정 같은 것들. 몇몇 동그라미는 그런대로 확실한 얼굴이 된 것 같았다. 나머지 대부분은 별것도 아닌 특징들이 삐죽빼죽 과장된 도형이 됐다. 그조차도 못 되면 구멍 몇 개 뚫린 멀건 덩어리로 남았다. 구멍에서 나오는 목소리로 이름을 떠올릴 수 있으면 다행이었다. 목소리에 민감한 편이라서 도움이 된건지, 얼굴을 모르니 목소리라도 기억하게 된 건지는 모르겠다.
그러는동안 나 자신도 조금씩 변했다.
기르던 머리를 잘랐다. 그래도 나는 나였다.
안경을 새로 맞추었다. 그래도 나는 나였다.
입는 옷이 바뀌었다. 그래도 나는 나였다.
체중이 크게 변했다. 그래도 나는 나였다.
가장 쉽게, 가장 가까이서 보는 얼굴. 내 얼굴. 하나씩 바뀌어갔지만, 그래도 아직 나였다.
여럿이 함께 찍은 사진에서 나를 찾지 못했다. 그래도 아직 나였다.
다른 사람이 찍은 내 사진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래도 아직 나였다.
직접 찍은 사진을 보며 이렇게 생겼던 적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아직 나였다.
문득 거울에 비치는 내 모습을 보며 많이도 변했다고 느꼈다. 그래도 아직 나였다.
아직 나인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생각보다 많은 것이 바뀌었지만, 그래도 내 안에서는 내 얼굴이 가장 얼굴이라고 할 만했다. 가장 쉽게 가장 가까이서 보는 얼굴. 내 얼굴. 그래도 아직 나였다. 어쩐지 불안하게 안심하며 안경을 벗고 얼굴을 씻었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을 얼른 수건으로 닦으며 다시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아까 보았던 얼굴 그대로였다. 그대로인 눈, 코, 입, 눈썹이나 점 따위들이 얹힌 동그라미. 있을 자리에 있는 것들의 도형. 붙을 곳은 붙고 뚫릴 곳은 뚫린, 뭐 그런 멀건한 덩어리. 그래도 그건,
아직도 너야?
[BGM : <忘れもの> from Musmus ( http://musmus.main.jp/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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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에 맞춰서 힘을 빼고 쓰려고 노력했는데 잘 됐는지 모르겠다.
만화로 그리다가 말았는데 역시 만화로 그릴 걸 그랬나 하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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